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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노트

행민 2010. 5. 9. 14:10

 

                                           

                                            1. 인생의 노화(老化)와 수명(壽命)에 대한 시각(視角)

표제부터가 서먹한『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서울대 생물학교수 최재천). 그리고『평균수명 120세, 축복인가 재앙인가』(캐나다 퀸스대 철학교수 크리스틴 오버롤). 이 두 권의 책을 뒤늦게야 접했기에 연말을 마무리 한다는 담담한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내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삶의 조건의 급속한 변화에 맞춰 시급하게 삶의 양태를 재정립해야하는 우리 인간의 당면상(當面相)을 담론으로 다룬 것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정상수명은 대략 120세로 볼 수 있다 합니다.

정상수명이 평균성장기간(인간의 경우 20년)의 6배라는 계산(프랑스 생물학자 부퐁의 견해)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2004년 말 까지 실증된 인간의 최고수명은 122세라고 합니다(1997년 사망한 프랑스인 잔 칼망).

그리고 100세 이상 노인이 우리나라에는 1,296명(2004년 현재)이고, 선진국에서는 인구 1만 명 중 1명꼴이라고도 합니다.

최 교수는 머지않아 인간의 평균수명이 100년이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전반50년을 제1인생기(번식기) 후반50년을 제2인생기(번식후기)로 구분하고, 이에 상응한 두개의 인생체제로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전망 가운데 중요한 것은 제2인생기를 지금처럼 잉여인생인 것(뒷방노인)으로 체념하지 않고 당당하게 거듭나는 멋진 인생(정상사회인)으로 맞이하려면 제1인생기서부터 제2인생을 적극적으로 철저하게 일찌감치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얼개로 제1인생기와 제2인생기라는 인생 이모작(二毛作)시기의 도래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버롤 교수의 저서에서는 인간생명의 연장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관해 찬반양론으로 갈리어 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명연장 반대론에서는,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도 죽음 자체를 회피해 보려는 것이 생명연장의 시도이므로 이를 반대한다는 것이고, 생명연장 찬성논자들은 이미 나이 들고 노쇠해진 늙은 세대라 해서 청소되어야 할 사회적 짐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인간이 반드시 죽어야 할 의무도 없는 것이기에 가능한 한 오래 살아야 한다는 데 적극적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버롤 교수는 장례식에서 어느 목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듣고 자신도 그와 같은 생각을 탐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삶은 연극과 같다. 중요한 것은 그 연극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지가 아니라, 배우들이 연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이다. 삶의 탁월성이 개인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럼에도 각자가  출연하는 연극의 길이가 중요하며 연극이 지속되는 시간은 삶의 질과 가치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오버롤 교수는 “결론적으로 평균수명 100세~120세가 재앙이라기보다 축복에 가깝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비록 인간이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오래 살아야 충분한 삶이라 할 것인가, 이 지상에서 죽음 없는 영원한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는 여전히 철학적으로 계속 탐구되어야 할 사항이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원저(原著)의 제목이 『Aging, Death, and Human Longevity―A Philosophical Inquiry』인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화, 죽음, 수명과 같은 이슈(issues)는 고래로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아가고자하는 개인적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지속적으로 천착되어온 중요한 화두입니다.

노화와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인간의 조건이어서 지금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며, 오늘 건강한 사람도 다음 어느 땐가는 병들게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삶이란 초년 중년 말년이라는 각 과정에서의 체험은 그것대로 가치 있는 것이고 말년의 인생도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소중함이 내포돼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비록 일회적 삶에서나마 후회스러움이 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담론들을 살펴보면서 65세 이후인 세대 속칭 ‘지공세대’가 삶의 무의미한 단계인양 치부되려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이 시기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가를 이제 겨우 터득하게 되면서 노쇠와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는 안타까운 시기이기도 하지만 보람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는 결실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폭넓고 깊은 성찰이 태부족함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한낱 저만의 기우가 아니고 이 시대정신의 각성의 단초일 겁니다.

개인적 철학의 빈곤에서 기인된 것이라 치부해버리려는 단견(短見)에서 벗어나 공동체 차원에서 합당한 길을 찾고자하는 사회적 책임을 새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열망하게 됩니다.

이젠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절박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2. 이른바「명심육행(銘心六行)」

연초에 모처럼 죽마고우인 지인(知人)과 강변산책하면서 나눴던 얘기 거리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오랜 공직생활에서 은퇴 후 줄곧 어느 종교단체에서 봉사활동하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이 날 오갔던 많은 대화 중에 저의 가슴에 크게 와 닿던 대목은 ‘오늘날 나이든 노인들이 유념해야 할 주요 덕목이 무얼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봉사활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면서「명심육행(銘心六行)」이라는 것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인격수양서인『명심보감(明心寶鑑)』을 패러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노장(老壯)연배들이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기에 바람직한 사항으로 생각됐기에 장황하나마 글로 정리해 봤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공심(空心)에서 비롯하여 1변(便)), 10소(笑), 100담(談), 1,000독(讀), 10,000보(步)를 명심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진법(二進法)이 아닌 십진법(十進法)을 취하고 있으니 아날로그적 사고유형임에 다름없겠으나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루를 공심(空心, 零)으로 비롯해서 공심으로 복귀하기.

마음은 비워 허공 속을 노닐고, 몸은 낮추어 땅에 닿도록 하자는 겁니다.

인생의 긴 여정(旅程)에서 마음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온갖 먼질랑 털어버리고 어린애 상태 즉 순진무구의 동심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랍니다.

숱한 체험을 거친 애늙은이가 되자는 것입니다.

노욕(老慾)은 곧 꼴불견의 전형인 노추(老醜)로 연결되고 때로는 울화병(火病)의 쏘시개가 되며 제 명(命)마저 재촉케 하는 촉매제가 되기 마련이니 여독(旅毒)을 떨쳐버리자는 것입니다.

몸 역시 곧추세운 상태에서 혹독한 세파에 시달릴 것 없이 되도록 땅에 가까이하는 겸손(謙遜)의 자세를 익혀나가라는 것입니다.

겉 육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쇠의 길을 달리고 있는데도 소유적(所有的) 욕망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병리적 상황을 단속(團束)해서, 지족지지(知足知止)의 존재적(存在的) 무욕의 체험을 쌓아나가라는 것입니다.

‘시지프’의 고행(苦行) 속에서 정체가 모호한  ‘고도(Godot)'를 향한 지루한 기다림일랑 접으라는 것입니다.『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그리고, 심신(心身)의 비워진 공간(空間)을 삶의 최고지혜인 황금률(黃金律)로 채워나가란 것입니다.  즉 이웃을 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타적 심성과 행위로 메워나가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사랑. 자비(慈悲). 인(仁)이라는 개념으로 함축시켜 지향해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삶의 끝자락에서나마 체현(體現)해보자는 것이랍니다.

둘째, 하루에 1변(便) 습관화하기.

규칙적으로 1일 3식(食)을 해 오듯이 1일 배변(排便)도 습관화해보자는 것입니다.

건강에 마음을 제법 쓴다는 사람도 자칫 1일(日) 1변(便)의 중요성을 잊기 쉬우나 신진대사관리에서 영양분섭취(Input)못지않게 노폐물배설(Output)에도 관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체내에 잔류된 노폐물과 이로 인한 독소는 신진대사기능을 저해시키고 면역체계의 균형도 깨뜨려 인체의 노화를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숙변(宿便)과 숙독심(宿毒心;탐.진.치)의 배출은 몸의 생리(生理)와 방하심(放下心)을 위해 효과적인 해독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랍니다. 

셋째, 하루에 10소(笑) 짓기.

하루 열 번 이상 웃는 것을 습관화하잔 것입니다. 웃음은 얼굴 표정을 통한 스트레스 관리랍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얼굴에 웃음이 점차 뜸해진다고 합니다(영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어린아이 때는 하루에 400번 정도 웃던 게 어른이 되면 6번 정도밖에 웃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는 웃음이 강자(지배자)의 약자에 대한 우월적인 입장에서의 힘의 표현이라 해서 웃는 표정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봤던 적이 있었지만〔『웃음의 미학』(류종영),루가복음 제6장21절,25절〕, 이제는 웃는 것 자체가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비타민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일소일소일노일로(一笑一少一怒一老),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로 회자되듯이, 밝고 따뜻하고 환한 웃음은 즐거움과 긍정적인 사고의 표현방식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어왔다는 겁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경험을 갖게 되는 사례가 많다고 하고, 그러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웃음이 없는 사람일거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답니다.

설사 처음에는 얼굴표정만 짓는 어설픈 웃음이었다 해도 종국에는 마음까지 웃는 함박웃음으로 발전된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많은 웃음을 보내면 보낼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웃음도 그만큼 많아지고 주위로 넓게 빠르게 확산된다는 웃음의 증폭효과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얼굴은 웃으라고 있는 것이고 웃음만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만병통치약)라고 웃음의 일상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웃음 예찬론자도 있답니다(조 지라드).

웃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웃음은 우리의 안면구조상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얼굴을 찡그리려면 근육 64개가 필요한데 비해 웃는 데에는 단 13개만 필요하다함), 우리들은 웃음과 친하지 못한 상태에 있고 특히 노인네들의 얼굴에는 무뚝뚝하거나 무표정이 두드러진 근엄한 모습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노인들이 웃지 못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랄 수가 없답니다. 불화(不和)가 반영된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웃음과 유머를 잃은 우리 어르신들에게 바야흐로 웃음을 되찾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광복(光復)운동이 진리란 광명을 되찾기 위한 정신적 복원운동이듯이 건강한 웃음을 되찾기 위한 소복(笑復)운동도 노(老)장(壯)청(靑)유(幼)가 다함께 벌리는 사회운동으로 제창(齊唱)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홍소(哄笑)이든 미소(微笑)이든 가릴 것 없이 열 번 이상 웃고 웃기는 소복운동에 동참해서 웃음꽃이 만발한 명랑사회 건설에 앞장서자는 것이랍니다.

넷째, 하루에 백담(百談)이상 말(說)하기.

하루에 100 마디 이상의 말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설의 조절에 관한 얘기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행동은 느린데 반해 양기가 입으로 뻗쳐 말만은 많아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기우(杞憂)나 노파심에서 하는 노인네의 잔소리를 말하는 것이고, 정작 노인들에게는 말다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주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젊었을 때보다는 말을 접고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유(思惟)기능의 외적표출수단이라 할 수 있는 말의 빈도가 적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고기능이 퇴화되어 자폐증 내지는 치매증세로 악화될 조짐인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말하기는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 합니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인지하고 체험한 진실과 지혜를 타인에게 설파함은 인류공동체를 키워나가는데 소중한 덕목이기도 하답니다. 불가에서 법보시(法布施)와 애어섭(愛語攝)을 중요시하고, 기독교에서도 복음전파를 신도들의 주요사명으로 하고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노인들이 대화와 주장을 할 때 몇 가지 사항은 조심하고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의 말씀은 대체로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이고, 자기 과시적이거나 아니면 비관적이며, 지나친 현실비판과 부정적인 성향이 짙다는 것입니다.

노년층 담화의 주류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으로 흐르기 쉬운 것은 사회의 역동적인 흐름에 나이 들면서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다는 데서 오는 현상이기도 하답니다.

그러나 천하 절세미인에게도 각자 나름의 결점이 있듯이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 없기에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사상도 완전할 수 없다는 명제를 무시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열린사회와 그 적들』(칼 포퍼).

그러기에 열린 마음과 열린 자세를 가져야하는데도 나이 들게 되면 고정관념과 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고 한답니다.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현대사회에서 부정적(否定的) 사고로는 긍정적(positive)인 반응을 얻어내기 힘든 것이고, 오히려  칭찬과 긍정이 보다 효과적인 가르침이며 자극적인 동기유발의 방법이란 것입니다.

사회의 원로(元老) 입장에서는 먼저 젊은이들에게 격려와 칭찬 그리고 긍정적인 덕담을 많이 해주는 게 바람직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칭찬과 격려에 목말라있기도 하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은 내용이 어려운 것은 참아내지만 재미가 없는 것에는 참을성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사법에서도 해학과 위트 넘치는 유머의 사용을 주저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머를 통한 재미와 경륜이 배어있는 생생한 말씀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경쟁력이 있을 거랍니다.

중천금(重千金)의 무게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권위, 그리고 삼사일언(三思一言)으로 절제된 원로(元老)들의 덕담은 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효모이고 청량제와 다름없기 때문이랍니다.

다섯째, 하루에 천독(千讀) 실천하기.

하루에 천 개 이상의 글(字)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독서습관을 갖자는 것입니다.

평소 독서가 습관화돼있지 않고 체력과 시력이 떨어져 가는 상태에서 다시 독서를 시작하고 계속해가기는 어려운 일로 생각될 테지만 노인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와 지혜를 갖추는데 독서는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라 한답니다. 

나이든 어르신이니까 의당 갖추고 있을 거라 기대되는 고전(古典)에 관한 소양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첨단지식정보의 습득에도 게을러서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 부적응 인사로 치부되기 때문이랍니다.

“하루 중에 글을 읽지 않는다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蕀)”라고 독서를 강조하신 안중근 의사의 유훈(遺訓)은 인간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독서를 통한 정신적 자양분의 섭취에 게을러서는 안 됨을 깨우치게 하고 있답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독서하는 모습은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 바로 그것이기에, 후생(後生)들이 존경하면서 바라보기에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라 한답니다.

여섯째, 하루에 만보(萬步)걷기.

하루에 만보 가량 걷는 활동으로 심신을 단련하자는 것입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김영길저)라는 책은 그 제목에서부터 영감을 주듯이 표현은 간결하지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합니다.

뇌졸중으로 쓸어졌다가 10여 년간‘오로지 걸어야한다’는 일념으로 끈질긴 투병생활 끝에 재기에 성공했던 어느 주인공의 생생한 체험담이 담긴 책도 시중에 출판돼 있다합니다.『뇌졸증 치료, 등산이 으뜸이다』(우재구저).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을 부지런히 하라는 병원 의사들의 권고로 봐서도‘걷기’는 인체건강유지에 기본이고 지름길이 되는 운동이랍니다.

하루에 만보의 운동량이면 족하다는 것이니 이를 목표로 하되 각자의 형편에 따라 운동량을 조절해서 실천하자는 것이랍니다.

걷기를 예찬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떠올려 보는 것도 걷기의 중요성을 되새기는데 도움이 되리라 합니다.

인도의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투쟁 중에 단디 소금행진대열의 선두에 서기도 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걷기가‘운동 중의 왕’이라 하면서 인도인이 실생활에서 실천할 것으로 채식과 걷기를 권고한 바 있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도시의 인디언이라고 불릴 정도의 열광적인 산책가여서 거의 대부분의 글을 산책하면서 구상했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칼날 같이 정확한 시간의 산책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장작 루소는‘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한다’라고 걷는 것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출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나이 60넘어 현역에서 은퇴하고서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서안에 이르기까지의 3년에 걸친 장거리 걷기 체험을 하고서 이와 관련된 여러 뜻있는 에피소드를 담아『나는 걷는다』라는 저서를 출판했답니다.

이처럼 걷기라는 신체활동은 육체운동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의 공통 수련수단으로 고금동서의 저명인사들이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즐겨 선호했던 취미이자 생활의 주요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합니다.

오늘날 주로 비좁고 답답한 도시공간에서 생활하는 대부분 노인들의 입장에서는 돈 없이도 하기 쉬운 ‘걷기운동’에서 심신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생활자세일거라고 한답니다.

10년이 종전의 30년(1세대)과  맞먹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이상의 여섯 항목을 조야(粗野)하지만 뿌리와 줄기라는 수양덕목으로 삼아, 수기치인(修己治人). 성기성물(成己成物)하는 거목(巨木)으로 우뚝 서시라는 것이랍니다.  

                                       

                                                 3. 장수관(長壽觀)

저는 얼마 전「장수비결(長壽秘訣)」이란 제목의 글을 쓴 바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이어트해서 가능한 한 비우고 슬림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타적(利他的) 성향의 생활자세를 가짐이 장수하는 지름길이다”라는 내용의 함량 미달인 가벼운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장수(長壽)라는 개념에서 ‘오랜’이란 기간도 중요하지만 ‘삶의 내용’이 진정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문헌에서 발견하면서 제 자신의 방점(傍點)이 이동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충실한 삶이란 건강하고 유쾌한 삶, 친구들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삶, 자신이 만족해하는 삶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걸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삶이란 얼마를 벌었느냐(성취했느냐)가 아니라 살아 온 동안 얼마나 나누었느냐(더불어 섬겼느냐)를 중요시 하는 삶이라는 견해를 자주 읊조리게도 됐습니다.

어떤 분이 쓴 다음 몇 줄의 글귀에도 시선을 오랫동안 머물었던 적도 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소망하는 것을 얻도록 충분히 도움을 주면 자신이 얻고 싶은 것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인생은 평화롭고 달콤해진다.”

또한, 삶에서 일관성의 중요성 즉 몸과 마음의 지조(志操)가 인생 후반기에서 크게 평가받고 마무리 된다는 사실(史實)에도 눈뜨게 됐습니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의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이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이 아랑 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지조론(조지훈)><채근담>.  

그리고 모(某) 방송의 에필로그에서 간결하게 잘 정리해서 방송된 멘트에 귀를 활짝 열기도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장수(長壽)는 유전적인 요인이 25%, 후천적인 요인이 75% 작용한다고 합니다. 후천적인 요인으로 활발한 육체적인 활동과 적극적인 정신자세가 장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겸손(謙遜)과 성실(誠實)이 있게 되면 그 결과로 신(神)이 주신 선물(膳物)이 바로 장수(長壽)라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1월 10일,  김 행민)